외롭다.
돈만 있다면 흐르는 세월도 붙잡을 수 있을 것 같다.
뜬눈 장님으로 무작정 덮어두면 해결될것 같았던 일은, 사실 시간의 능력이 아니었을 뿐더러 오히려 낡고 닳은 오랜 시간 후에 자라난 세포처럼 더 탱글하게 내 앞에 나타났다.
뒤늦게 찾아온 성인 여드름을 덮으려 돈주고 몸헤치는 약을 먹었지만,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다시 매끄러운 내 얼굴에 흩뿌린 좁쌀처럼 귀엽게 올라와서 날 괴롭힌다.
차라리 여드름이었으면.
날 괴롭히는 네가 차라리 여드름이었으면 난 오히려 널 반기려 파티라도 열겠다.
추해지는 눈동자를 느끼면서까지 술을 마시고, 곧 토할 것 같은 담배를 다시 피면서도 아직 나는 뭔가가 허전해서 자꾸 마시고 먹고 누군가를 귀찮게 하고 또 실망을 시켰다.
누군가가 나를 좀 안아줬으면.
허전한 내마음을 채워주는 묵직하고 맛있는 뭔가를 줬으면.
밤새도록 희망에 넘치는 사례를 들어 내 머리카락을 쓸어넘겨 줬으면.
나에게 그 많은 돈을 아무 댓가 없이 줬으면.
좋겠다.
나는 2013년 3월에 다니던 직장을 그만뒀다.
3월 말부터 4월,5월을 오롯이 주부흉내만 내다가 세현이가 직장을 그만두던 6월1일부터 악명높은 토플을 시작했다.
워낙에 부족했던 영어문법을 원망하면서, 귀엽고 어린 학원생들을 부러워하면서, 토플이라는 그 악랄한 명성에 한층 더 복종하기 위해서 누구보다 독하게 매일을 혹사하며 영어를 배웠다.
별 친하지도 않았던 학구파 흉내를 내느라 채 두달이 되지 않아 우리는 둘다 체력이 방전되면서 정신력도 바닥을 치닫았고, 두달이 2년인듯 이제는 더이상 못하겠다며 존재하지 않는 무언가에 욕을 퍼붓을때, 동문 선배를 학원에서 우연히 만났다.
내가 힘든 만큼 너도 힘들겠구나, 기억도 나지 않는 말 한마디 한마디로 서로를 응원해 가면서우리는 다시 힘을 얻고 마치 전장의 전우를 보살피듯 서로를 부축여 다시 힘을 냈다.
다음해 가을학기를 목표로 비교적 빠듯하게 남은 일정때문에 이르지만 일단은 시험을 쳐보기로 하고 3달이 조금 못되어 8월 말에 첫 시험을 예약하고 남은 기력을 쏟아부어 지독하게 덥고 습했던 이번 여름을 이겨냈다.
결과는 생각보다 좋았다.
라고 말하기에 몸둘바를 모를 정도로 훌륭했다.
덕분에 나는 두리뭉실 하게 잡혀있던 미국 유학에 대한 틀이 잡혀졌고, 결국에는 학교를 진학해야 되겠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그리하여 그 날로 토플과는 작별인사를 하고 뒤늦은 유학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귀엽게 변덕스런 성격탓에 사회의 여러직종을 개념없이 돌파했던 나의 지난 경력을 원망하면서 석사는 뜬구름이라는걸 인정하고 학사편입으로 초점을 맞춰서 가야하는 학교를 추려내고, 그에 맞는 입시요강을 요약했다.
토플뒤에 가려진건 아주 커다란, 그리고 아주 중요한 포트폴리오라는 거대 산이다.
항상 믿고 있던 보험같은 내 손재주는 포트폴리오 라는 거대 산 앞에서는 불신으로 가득찬 조그만 고사리같았다. 내 고사리를 키워줄 튼튼한 그늘막을 찾아 인터넷 서핑을 시작했고, 몇 군데 돌아다니며 상담해본 학원들을 논리 정연하게 따져보다가.
난 돈이 필요하다는걸 알았다.
예전에도 알고 있었지만, 그때는 단지 알았을 뿐이었고, 차츰차츰 두리뭉실한 흰구름같던 조각의 퍼즐을 맞추면서 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게되었다.
네가 누군지 알고 나니 난 더 단단해졌어.
난 네 생각보다 단단해져서 가시까지 만들 수 있게 되었어.
내 가시가 내 옆의 사람들을 다치게 만들겠지만, 넌 알게될거야.
내 가시가 그들을 다치게 하는것이 아니라
결국엔 그들을 보호해 줄거라는 걸.
이라는 낯뜨거운 말까지 하게 될 정도로 난 돈이 필요하다.
